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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구/아랍 봉기

[아랍 봉기: 벨푸어 선언] 분쟁의 단초

by 롱카이. 2022. 4. 4.
  • 알리야עֲלִיָּ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로마 제국에 의해 수천년 간 팔레스타인פלשתינה 외 지역을 유랑하던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 집중적으로 거주했습니다. 1881년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 제국에 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추방했고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도시에서 추방되어 고향 팔레스타인פלשתינה으로 향했습니다. 1881년부터 1903년까지 이뤄진 제1차 알리야עֲלִיָּה(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가진 유대교 단어)에서 이민한 유대인 수는 적었고 오스만 제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פלשתינה 이주를 묵인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פלשתינה에는 이미 정착한 유대인들이 존재했고 오스만 제국은 1903년까지는 유대인을 심하게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04년부터 시작된 제2차 알리야עֲלִיָּה에서는 러시아 제국과 루마니아 왕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פלשתינה으로 대거 이주했고 팔레스타인פלשתינה은 유대인들로 가득찼습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فلسطين에 정착하며 살던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대거 이입으로 정착지를 잃고 쫒겨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팔레스타인فلسطين의 아랍인은 이 문제를 전세계에 호소했고 유대인은 불가리아 차르국과 러시아 제국에게서 받는 핍박을 피해 자유를 찾아 이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세계 1등 국가였던 대영제국은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유대인의 요구를 모두 들어야 했고 대영제국은 해결안을 모색했습니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

사이크스-피코 협정 중립지역
노란색: 중립지역

타톤 베네누토 마크 사이크스 대영제국 외교관과 프랑코 마리 데니 조르주 피코 프랑스 제3공화국 외교관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오스만 제국 치하의 아랍 지역을 분할했습니다. 하지만 타논 베네누토 마크 사이크스 외교관은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유대인 정착지를 정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프랑코 마리 데니 조르주 피코 외교관과 유대인 정착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유대인이 정착하는 예루살렘יְרוּשָׁלַיִם 일대는 이슬람 세력에게도 중요한 성지였고 무슬림들은 쿠드스القدس(예루살렘יְרוּשָׁלַיִם의 이슬람식 발음)에 이교도들이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대상은 무슬림들이 싫어하는 유대인으로 유대인 역시 무슬림들을 하등 신민으로 바라보며 협력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타논 베네누토 마크 사이크스 외교관과 프랑코 마리 데니 조르주 피코 외교관은 결국 예루살렘יְרוּשָׁלַיִם 지역을 연합국 통치 하의 국제 지역으로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논란의 땅을 유대인, 아랍인 그 누구의 영토가 아닌 지역으로 정해 종교적 갈등을 최대한 없애려고 노력했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입되는 하이파חיפה 항구를 대영제국 직할령으로 지정해 영국군이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 당시 쿠드스القدس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오스만 제국은 쿠드스القدس로 유대인이 유입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영국군의 유입은 허락할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이집트원정군에게 예루살렘Jerusalem을 점령할 것을 명했습니다. 허나 이집트원정군은 가자غَزَّةَ 전투에서 패배하며 예루살렘Jerusalem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시오니즘과 유대인 국가 건설

시오니즘
시오니즘

1917년 3월 예루살렘Jerusalem이 연합국의 치하에 들어가자 연합국은 예루살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영제국 유대인 의회와 이탈리아 왕국 유대인 의회는 각 국가의 중앙정부에게 예루살렘יְרוּשָׁלַיִם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요청했고 논의를 하면서 끊임없이 예루살렘יְרוּשָׁלַיִם에 유대인 국가 건립을 요구했습니다. 정치인 대부분은 종교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예루살렘 문제에 신중한 의견을 보였지만 대영제국의 외교장관 아서 제임스 벨푸어는 열렬한 시오니스트로 대영제국이 유대인 국가 건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영제국 정부가 회의적인 시선을 유지하자 아서 제임스 벨푸어는 1917년 4월 6일 미국 워싱턴으로 가 미국의 열렬한 시오니스트인 루이스 뎀비츠 브렌다이스 대법관을 만나 5월까지 유대인 국가 건립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5월 말 그와 대화를 마치고 대영제국으로 귀국한 아서 제임스 벨푸어는 1917년 6월 19일 대영제국의 유대계 거부 가문의 대표인 리오넬 월터 로스차일드 경과 바이츠만 경을 만나 앞으로 할 유대인 국가 건립 선언에 대해 평가받았습니다. 그는 두 유대계 대표에게서 허락을 받았고 시오니스트들을 더 모으며 유대인 국가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아서 제임스 벨푸어 벨푸어 선언
아서 제임스 벨푸어

대영제국의 시오니스트들은 아서 제임스 벨푸어 휘하에 응집했고 그들의 목소리는 커졌습니다. 대영제국 정부는 시오니스트들의 큰 목소리에 응답했고 1917년 9월 3일 미합중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아서 제임스 벨푸어가 준비하는 선언을 허락하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대답을 회피하다 1917년 10월 31일 허락했고 아서 제임스 벨푸어의 선언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벨푸어 선언 전문
벨푸어 선언

1917년 11월 2일 아서 제임스 벨푸어는 리오넬 월터 로스차일드 경의 집에 방문해 하나의 편지를 놓았습니다. 대영제국은 그 편지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Jerusalem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리오넬 월터 로스차일드 경과 대영제국 시오니스트들은 해당 선언문을 보고 예루살렘יְרוּשָׁלַיִם에 유대인 국가를 건립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불확실하게 끝난 선언은 추후 거대한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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