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교훈
1870년-1871년 서유럽의 강자를 두고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서유럽의 절대강자 자리를 지키는 프랑스와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프로이센의 자존심 싸움이었습니다.
- 독일의 전략
프로이센을 지휘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은 독일이 강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프랑스를 짓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영국과 러시아와 친밀관계를 유지하며 프랑스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고 기회가 오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프랑스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휘할 프로이센의 총참모장 자리에 헬무트 폰 몰트케를 임명했습니다.
헬무트 폰 몰트케는 독일 사정을 파악하고 승전을 위한 최고의 전략을 계획했습니다. 독일은 유럽 한가운데에 있는 국가로 다양한 나라와 국경을 접했습니다. 때문에 최악의 경우 다양한 주변국과 전쟁을 벌이는 다면전쟁에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방면에서 침입을 받으면 당장은 효과적으로 방어해도 전쟁을 오래 끌면 결국 어느 면에서 뚫리게 되고 독일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에게 장기전은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빠르게 적을 굴복시켜 승리를 하는 전략을 군사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그 근본적 전략을 이룩하기 위해 몰트케 총참모장과 그의 유능한 참모장은 작전적 사고를 정립했습니다.
헬무트 폰 몰트케가 주장한 작전적 사고는 기동을 통해 회전에서 적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적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적은 물리적으로 섬멸되기 전에는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적을 섬멸해 전쟁 의지를 꺾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회전을 벌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회전會戰은 양측의 부대가 진영을 짜서 대규모로 붙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전으로 적의 많은 병력이 모일 것이고 회전에서 그 적들을 격퇴한다면 그것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섬멸당한 적은 많은 병력을 잃을 것이고 전투에서 그리고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회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습니다. 회전에서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는 아군 병력의 빠른 기동이 필수였습니다. 빠른 기동은 두가지 목적을 가졌습니다.
첫번째 목적은 빠른 병력 동원이었습니다. 다방면에서 침입을 받을 위험이 있는 프로이센은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해 전쟁을 빠르게 종료하고 다른 곳으로 병력을 이동해 그곳에서도 빠르게 전쟁을 종료하는 전술을 채택했습니다. 그래서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빠르게 보내야 했습니다. 독일은 전국에 촘촘한 철도망을 건설해 철도로 병력을 빠르게 보냈습니다.
두번쨰 목적은 분산과 집중이었습니다. 대규모 회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병력이 집결해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병력이 항상 집중되어있다면 필연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보급은 철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철도는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보급을 전달했지만 역에서 내린 보급품은 사람과 마차가 일일히 전쟁터까지 실고 날라야했습니다. 때문에 운반해야 하는 보급품이 많다면 보급이 늦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면 병사들은 물과 먹을 것, 무기가 항상 부족했고 이때 적의 공격을 받으면 무너질 위험이 컸습니다. 대규모의 병력이 보급 문제에 허덕이는 동안 적의 공격에 무너지면 오히려 독일이 섬멸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진격하는 동안 병력을 분산하고 대규모 회전에 병력을 모두 모아 총공격하는 것을 전술로 삼았습니다.
- 전쟁의 승리와 잊혀진 교훈
헬무트 폰 몰트케는 이 개념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적용했습니다. 전쟁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 국경지대인 알자스 로렌에 많은 요새를 지었습니다. 독일군은 요새를 함락(섬멸)하기 위해 군을 모아 총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국경지대의 요새를 차례대로 함락한 독일군은 병력을 나눠 프랑스 영토로 진격했습니다. 프랑스 영토로 빠르게 진격한 독일군은 요새에서 탈출한 프랑스 잔존 병력이 남아있는 메츠 요새에 병력을 집결해 메츠 요새를 함락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분산한 독일군은 메츠 요새를 구원하려 출동하다 실패한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예비군을 스당 요새에서 포위하며 다시 집결했습니다. 이제 독일은 승리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전쟁터에 나서며 독일군은 프랑스 국민전쟁을 마주했습니다. 때문에 독일군은 국민군을 하나하나 섬멸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다행히 국가방위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고 국민군이 해산해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초반에 작전적 사고로 빠르게 승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황제가 위험에 처하자 프랑스 국민이 들고 일어났고 독일군은 전에 보지 못했던 국민전쟁을 마주했습니다. 독일은 파리 근교에서 프랑스 국민군을 진압해야 했고 무기와 식량을 소모해갔습니다.
프랑스의 국민전쟁은 독일의 작전적 사고를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군 병력을 섬멸하면 전쟁이 끝나는 작전적 사고와 달리 국민전쟁은 국민이 전쟁에 동원되어 모두 죽기 전까지 전쟁을 끝내지 않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는 장기전을 요구했고 때문에 독일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완전히 항복해버리면서 독일은 승리를 했고 독일은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 와중에 국민전쟁은 잊혀졌고 독일은 헬무트 폰 몰트케의 작전을 고수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새로운 전쟁을 봤음에도 초반 승기가 너무 눈부셨던 나머지 새로운 양상의 전쟁을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 기우는 프랑스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전국토가 유린된 이후 지속적인 저출산과 인구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인구가 감소해 자연스럽게 노동인구가 부족해졌고 프랑스 산업은 정체기에 머물렀고 인구는 프로이센과 대영제국에 밀렸습니다. 그 와중에 전쟁으로 수많은 프랑스인이 죽고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 지급으로 프랑스 경제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더욱이 프랑스 철광석과 석탄의 90%를 담당하는 알자스 로렌 지역을 독일에게 뺏기면서 프랑스의 중공업은 침체되었습니다. 때문에 1873년 프랑스는 대불황을 겪었습니다. 동시에 이 일의 원흉인 독일에 대한 증오도 더욱 커졌습니다.
- 프랑스의 교훈
뼈저린 패배를 실감한 프랑스는 독일군의 참모 체계를 배워 자국 군에도 적용시키고 군대를 현대화하고 철도를 부설해 보급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반드시 알자스 로렌 지방을 되찾는 것을 국가 수완으로 삼았습니다.
- 슐리펜 계획
비스마르크가 해임되고 빌헬름 2세의 적극적 공세로 독일은 주변국에게 포위되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견제를 받고 있었고 전쟁이 시작되면 프랑스와 러시아 양측의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먼저 프랑스를 치고 러시아를 치는 것을 군 전략으로 세웠습니다.
러시아는 영토가 거대하고 유럽에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아 러시아와의 전쟁은 단기간에 끝낼 수 없다는 이유엿습니다. 더불어 나폴레옹이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독일은 러시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러시아와 전쟁 시 폴란드와 발트해 근교(상트페테르크부르크)까지만 가는 것이 독일의 목표였고 때문에 러시아군에 결정적 한방을 먹일 수 있는 가능성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러시아와 장기전을 대비했고 장기전을 하기 위해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프랑스도 전쟁대비를 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 국경지대에 요새들을 건설해 요새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주력 병력을 방어선에 보내 독일의 침입을 대비했습니다.
독일 육군은 42일 이내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독일군은 러시아 군이 총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소집하고 독일 국경에 도착하는 시간을 42일로 예상했고 러시아 주력 부대가 독일 국경에 나타나기 전에 병력을 프랑스에 집중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42일 안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려면 프랑스군과 정면충돌은 위험했습니다. 이미 방어선을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프랑스군과의 정면충돌은 독일의 신속한 기동을 막았고 혹여 전투에서 패배해 프랑스군이 독일 영토까지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프랑스 주력부대를 우회해 바로 파리로 진격하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이 작전은 독일 육군원수 알프레드 폰 슐리펜 총참모장이 1905년에 작성했습니다.
작전 수립자 알프레드 폰 슐리펜의 이름을 딴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의 허점을 찔러 빠르게 파리를 점령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국경지대에 적은 병력을 배치해 전략적 후퇴를 하며 프랑스군을 유인 섬멸하고 상대적으로 병력이 없는 프랑스 북부에 주력 부대가 빠르게 우회기동해 파리를 포위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국경지대에서 유인을 하는 동안 병력이 우회기동해 적군의 뒤를 급습하는 이론상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 계획의 문제점
1) 너무도 완벽하고 세부적으로 세운 작전
슐리펜 계획은 42시간 내 끝내야 하는 계획으로 시간 제약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계획은 1분1초 꼼꼼하게 세워졌고 한번 시작하면 계획대로 실시되어야 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전장에서 계획대로만 실행은 실패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계획을 세우는데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고 경고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명장 헬무트 폰 몰트케는 아무리 잘 짜여진 전술, 작전상의 계획이라도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는 말을 남기며 완벽한 작전수립을 경고했습니다.
2)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우회기동
프랑스 북부를 우회기동하는 부대의 진격속도도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세웠습니다. 우익부대는 벨기에에서 파리까지 도보로 행군해야 했는데 수백미터 이상의 거리를 직접 발로 걸어 며칠 안에 도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병사들은 사람으로 무거운 군장을 메고 며칠 행군하면 당연히 지치고 시간 내에 도착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3) 좁은 우회로
우익부대가 우회기동하는 경로에는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는 아르덴 숲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북부를 덮은 아르덴 숲은 그 거대한 면적으로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갈 수 없는 것으로 악명높았습니다. 때문에 독일군은 아르덴 숲을 피해 이동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아르덴 숲이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 넓게 포진되어있어 독일군이 이동할 지역이 너무 좁았습니다. 그 좁은 길에 많은 병력을 보내면 병력 이동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프랑스의 공격에 취약했습니다. 때문에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 서부군을 지휘한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는 우익부대 병력을 일부 빼야했습니다.
- 제17계획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 지방을 수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17계획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전 직후 프랑스 페르디낭 포슈 장군이 고안했고 1913년 조제프 자크 세제르 조프르 참모총장이 채택한 계획이었습니다.
제17계획은 독일제국군이 프랑스를 침공할 시 프랑스군을 알자스-로렌으로 진격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제17계획은 사실상 전쟁 계획보다는 병력 배치 계획에 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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