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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종료/전쟁 종전 후 협정

[전쟁 종전 후 협정:세브르 조약] 분할된 아나톨리아 반도

by 롱카이. 2022. 4. 13.
  • 승전국의 이권다툼

사이크스-피코 협정 지도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8년 11월 최후의 동맹국인 독일제국이 항복하고 연합국은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연합국은 전쟁 동안 꽤 선방하며 연합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독일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철저하게 짓누르려고 했고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로 진입하며 서로 영토를 두고 힘겨루기를 했습니다.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은 예전에 체결한 사이크스 피코 비밀 협정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남부 지역을 분할했고 추가로 아나톨리아 반도도 분할하기로 했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은 튀르크 민족의 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유럽 승전국들은 미국을 협상에 초대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아나톨리아 반도 분할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반도 분할은 예상보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가담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러시아 제국이 약속한 아르메니아 지역을 어떻게 처리할 지 문제가 발생했고 그 외의 여러 문제들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특히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 지역이 첨예한 논쟁거리로 떠올랐는데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는 쿠르드 민족과 아르메니아 민족들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때문에 연합국에 가담한 아르메니아 민족과 쿠르드 민족에게 영토를 줘야 했는데 민족 영토가 겹치다보니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 아나톨리아 분할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그리스 왕국 순양전함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는 그리스 왕국 순양전함

1919년 파리 평화 회의 이후 승전국은 아나톨리아 반도 분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충돌하며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 조약은 연기되어갔고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튀르크 민족봉기를 일으켰습니다. 1919년 5월 23일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은 콘스탄티니예에서 민족 부흥 시위를 열며 콘스탄티니예를 점령한 연합국에 반발했고 연합국은 이에 놀라며 아나톨리아 분할안을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그리스 왕국과 하야스탄 공화국 역시 아나톨리아 분하에 자신들의 영토를 넣을 것을 요구했고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1920년 마침내 아나톨리아 반도 분할안을 확정했습니다.

세브르 조약 지도
세브르 조약(영토)

아나톨리아 반도 분할안에서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부분은 중립지역으로 만들어 그 어떤 국가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그리스 왕국에게 에게 해 제도들과 아나톨리아 반도의 스미르니Σμύρνη 지역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키프로스Cyprus 섬은 대영제국이 모두 가지기로 했고 하야스탄 공화국은 반Վան과 에르주름Էրզրում을 점령하고 유프라테스 강 동부의 쿠르디스탄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겨두되 자치공화국을 설립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를 보장받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데스Rodes 섬과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는 이탈리아 왕국이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영토에 대한 협상이었고 경제구역은 영토보다 더 내부로 침투했습니다.

세브르 조약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빗금: 경제구역

프랑스 제3공화국과 대영제국, 이탈리아 왕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아나톨리아 반도 내부로 경제 영역을 정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아나톨리아 남부와 쿠르디스탄 서부의 영역에 경제력을 행사하고 대영제국은 쿠르디스탄 동부에 경제구역을 설정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은 실질 영토는 포기하는 대신 아나톨리아 서부에 경제구역을 얻어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튀르크 장교단의 반발

술탄의 명에 따라 튀르크 장교단에게 가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술탄의 명에 따라 튀르크 장교단에게 가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한편 승전국들이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의 튀르크 민족주의자들과 장교들은 제국의 패배에 반발했습니다. 서쪽으로는 그리스군이 침공하고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군이 침공해오자 오스만군 장교들은 피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말고 지금이라도 들고 일어나 연합국들을 몰아내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술탄 메흐메트 6세는 그 의사를 따를 의지를 잃었고 무력하게 제국의 최후를 기다렸습니다. 이에 튀르크 장교들은 앙카라أنقرة에서 튀르크 장교단을 결성했고 또다른 정부를 세웠습니다. 콘스탄티니예قسطنطينيه의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앙카라أنقرة 튀르크 장교단을 반역 행위로 간주했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그들을 진압할 것을 명했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튀르크 장교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튀르크 장교들

하지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술탄을 배반하고 앙카라أنقرة 튀르크 장교단에 합류했습니다. 튀르크 장교들은 전쟁 영웅의 합류에 환호했고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그의 휘하에 뭉쳤습니다.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장교들을 모으고 술탄제를 폐지하고 튀르크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외세의 침공으로부터 튀르크 민족을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을 선포했습니다.


  • 세브르 조약

오스만 제국 세브르 조약 사진
세브르 조약

승전국들은 1920년 아나톨리아 분할을 확정했고 1920년 8월 10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6세와 대표들을 프랑스 제3공화국의 파리Paris 인근 세브르Sèvres에 있는 도자기 공장의 전시실에서 세브르 조약을 맺었습니다. 패전국의 술탄이었던 메흐메트 6세는 부당한 조약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고 술탄이 조약에 서명하자 오스만 제국은 조약의 내용대로 분할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순식간에 영토가 축소되었고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혼란 속에서 튀르크 민족들은 외세의 침공에 두려워했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튀르그 독립군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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