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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구/서부전선

[서부전선: 제1차 이프르 전투] 마지막 돌파구

by 롱카이. 2022. 1. 21.
  • 제1차 이프르Ypres 전투

제1차 세계대전 벨기에 이프르
마지막 돌파구 이프르

독일군에게 남은 돌파구는 아프르Ypres 뿐이었습니다. 독일군은 마지막 돌파구를 반드시 뚫어야 했습니다. 이곳마저 뚫지 못한다면 독일군이 우회기동할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군도 이를 잘 알았고 이프르 일대는 독일군과 연합군의 대격돌 장소가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쟁 시작 후 현역군과 예비군을 모두 동원해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많은 현역군과 예비군을 상실하며 충분한 훈련을 받은 양질의 병사 상당수를 잃었습니다. 새로 충원한 병사들은 신입 병사들로 전장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 역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모병제였던 영국원정대는 수많은 병력을 잃고 피로도가 누적되었으며 프랑스군도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양측은 좋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기회를 위해 총력을 다했습니다. 마지막 혈투는 1914년 10월 19일 시작되었습니다.


 

  • 랑에마르크Langemarck 전투

제1차 세계대전 랑에마르크 전투 돌격하는 독일군
돌격하는 독일군

1914년 10월 19일 영국원정군 제1군단은 이프르Ypres 북부 랑에마르크Langemarck를 빈 공간이라 생각하고 랑에마르크로 진격했습니다. 랑에마르크를 지나던 영국원정군는 우연히 독일군을 만났습니다. 독일 제23,26예비군단도 랑에마르크를 빈 공간으로 생각하고 진격하던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양측은 곧바로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병력 면에서 열세였던 영국원정군은 부대를 축차투입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독일군은 병력을 충원하며 공격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프르 영국원정군 참호
젖은 영국원정군 참호

결국 열세였던 영국원정군은 참호를 파고 방어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플란데런Flanders에 참호를 파고 방어하려고 했는데 저지대였던 플란데런은 조금만 땅을 파면 물이 솟아나오는 지대였고 참호는 물에 잠겨있었습니다. 영국원정군 병사들은 더러운 물과 진흙, 각종 오염물질로 덮인 참호에서 방어해야 했고 병사들은 참호족에 시달렸습니다. 영국원정군의 참호를 발견한 독일군은 바로 앞에 참호를 팠고 독일군 참호는 고지대에 있어 영국원정군보다는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 아르망티에Armentières 전투

제1차 세계대전 아르망티에 전투 파괴된 마을
폐허가 된 아르망티에

절박했던 독일군은 또다른 돌파구를 찾아나섰습니다. 독일군은 아르망티에Armentières로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먼저 야포로 영국원정대 진지에 포격을 한 뒤 기병과 보병이 일제 돌격했지만 포격으로 메워진 웅덩이에 물이 차면서 땅이 질퍽해졌고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느려졌습니다. 이때 포격에서 살아남은 영국원정군은 독일군을 공격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저지했습니다. 영국원정군이 살아서 공격하자 독일군은 아르망티에Armentières를 포기하고 바로 다른 돌파구를 찾아 공격했습니다.


 

  • 겔루벨트Gheluvelt 전투

제1차 세계대전 벨기에 겔루벨트 전투 포격하는 독일군
포격하는 독일군

아르망티에에서 지지부진하자 독일군은 겔루벨트Gheluvelt를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독일군은 조금이라도 뚫릴 가능성이 있는 곳은 공격해볼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포격을 가해 영국원정대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독일군은 밀집대형으로 돌격했는데 영국 제2우스셔터 원정군의 반격으로 돌격에 실패했습니다. 독일군은 어떻게든 돌파를 하기위해 예비대를 동원해가며 공세에 나섰습니다.


 

  • 변하지 않은 전술과 소모전

제1차 세계대전 밀집돌격하는 독일군
밀집돌격하는 독일군

독일군은 이프르 전투에서 밀집대형으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밀집대형 돌격전술은 방어군을 향해 대량의 병사들을 투입시켜 방어선을 돌파하는 전술로 1800년대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전술이었습니다. 하지만 1800년대 말 고폭탄과 기관총의 등장은 밀집돌격하는 병사들을 순식간에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수뇌부는 밀집돌격을 고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돌파전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밀집돌격으로 밀고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합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밀집돌격으로 적을 밀어내는 전술을 애용했습니다. 무식하게 사람을 밀어넣어 밀어내는 전술은 발달하는 화력에 병사들을 전보다 비교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만들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 새로운 병사를 동원해 공세를 지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양측은 예비부대가 절실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본토의 예비부대와 인도제국군 부대를 투입했고 독일제국군은 대학생 자원병들을 투입했습니다. 마지막 돌파구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이 소모품처럼 버려졌습니다.


 

  •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이프르 전투 영국원정군과 독일군의 교전
영국원정군과 독일군의 교전

독일군은 11월 11일 겔루벨트Gheluvelt와 메넹Menen을 우회공격하기 위해 수녀의 숲None Bosschen, 폴리곤 숲Polygon Wood, 벨독 숲Veldhoek woods, 헤렌태지 공원Herenthage park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번 우회공격에 독일군은 최정예 부대인 프로이센 근위사단을 동원하며 마지막 공격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절박했던 영국원정군은 사방에서 진격하는 독일군에게 돌격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영국원정군은 독일군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고 때문에 비전투요원까지 전투에 투입시키며 처절하게 싸웠고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 독일군의 패배

이프르 전투는 독일군이 다시 프랑스 파리로 진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엔 강 전선에서 시작된 참호선은 북서쪽으로 길어지며 결국 프랑스와 벨기에 참호선이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독일군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 기회를 영영 잃었고 연합군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파울 폰 힌덴부르크
파울 폰 힌덴부르크

하지만 이프르 전투의 대가는 양측 모두에게 컸습니다. 독일군은 단기전 기회를 잃고 수많은 예비병력을 잃었습니다. 엔 강 전투부터 이프르 전투까지 독일군을 지휘했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 총참모장은 단기전의 기회를 날렸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독일 참모장들은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힌덴부르크를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팔켄하인 총참모장을 두둔했지만 힌덴부르크 중심의 참모장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독일 참모장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연합군의 영국원정군은 고도로 훈련된 인재인 직업군인 거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병력의 절반 이상 잃은 영국원정군은 더이상 공세를 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원정군의 존 프렌치 총사령관은 이후 수비적 자세만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징병제로 매일 병력을 보충받던 프랑스는 적극적 공세를 주장했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 영내에 독일군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영토 내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했고 수많은 병사들을 일제 투입해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는 전쟁의 승패는 야전사령관과 정부의 전쟁의사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전사령관과 정부가 전투를 계속 속할 의사가 있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프랑스는 군의 사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프랑스군에게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일제돌격해 방어선을 뚫는 것을 미덕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사상을 그들은 엘랑 비탈Élan Vital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군은 엘랑 비탈 정신을 바탕으로 독일군 방어선에 대한 끝없는 공세를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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