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
1915년 루시타니아 호 침몰사건으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중지한 독일제국은 대영제국의 해상봉쇄에 고통받았습니다. 대영제국의 해상봉쇄로 주요 수입로가 끊긴 독일제국은 순무의 겨울을 겪어야 했고 대영제국의 해상봉쇄를 뚫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 해군 군부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다시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독일제국 정부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면 중립국이었던 아메리카 국가들까지 연합군에 가담하게 만든다며 격하게 반대했지만 독일제국 해군은 1917년 1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습니다. 독일제국 해군 잠수함은 바다로 출격해 대서양과 북해에 있는 상선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수많은 중립국 선박들이 어뢰 공격을 맞고 침몰했습니다.
- 극비 문서: 치머만 전보
허나 독일제국은 미국과 아메리카 국가들을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메리카 국가들 중 압도적으로 강한 미국은 대영제국에 이은 전세계 2위 강대국이었고(독일제국은 3위) 독일제국은 대영제국 만으로도 벅찬데 미국과도 싸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르투르 치머만 독일제국 외무장관은 독일제국 해군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다시 하기 전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극비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독일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이후 미국이 중립으로 남기를 원하지만 만약 미국이 연합군에 참여한다면 멕시코 합중국과 독일제국이 동맹을 맺어 멕시코가 미국에게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더불어 일본 제국과도 동맹을 맺어 함께 미국을 치자는 내용도 담겨있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당연히 극비사항이었기 때문에 아르투르 치머만 독일제국 외무장관은 암호문으로 바꿔 주 멕시코 독일대사에게 전송했습니다.
- 멕시코 합중국의 반응
주재 멕시코 독일대사는 전보를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멕시코 대통령에게 보냈습니다. 독일의 동맹제의를 받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잠시 망설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독일과의 동맹을 거절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당시 독일은 전세계 3위 강대국이자 유럽 2위 강대국이었지만 대영제국 해군에 가로막혀 대서양으로 대량 선박 이동이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제국이 멕시코를 지원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멕시코는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압도적인 강대국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미국은 석유가 나오는 멕시코만을 노리는 상황이었고 멕시코 혁명 중 미국과 충돌이 발생해 언제 미국이 명분을 앞세워 멕시코만을 두고 전쟁을 벌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미국은 멕시코 베라크루즈Veracruz 항구를 점령해 멕시코 민중의 반미 감정을 자극한 상황에서 다시 한번 베라크루즈Veracruz 항구를 점령하려 하다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멕시코 대통령이 멕시코만 유전을 파괴할 것이라 협박해 물러난 적 있었습니다. 그 후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집중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멕시코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멕시코 고토 회복에 나서면 멕시코는 명백히 미국의 적이 되고 멕시코는 미국의 공격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멕시코 대통령은 국민들의 반미감정에도 불구하고 독일제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추후 치머만 전보 사건이 미국에 알려졌을 때 멕시코 합중국은 빠르게 독일제국의 제안을 거부했음을 증명해 미국과 갈등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 일본제국의 반응
일본제국 역시 치머만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일본제국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마자 연합군에 가담해 동아시아 독일군 조차지와 태평양 독일군 식민지를 차지해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굳이 싸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일본제국은 연합군 편에 서 연합군에게 물자를 수출하며 경제호황을 맞이하고 있었고 굳이 전쟁을 일으켜 경제호황을 제발로 걷어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은 치머만 전보를 무시했습니다.
- 암호를 해독한 대영제국
독일제국은 암호문을 대서양을 건너 멕시코 합중국으로 보냈습니다. 독일제국은 독일제국 선박으로 암호문을 전송하려 했지만 선박 운행이 취소되면서 실패했고 전파로 전송했습니다. 대영제국은 전파를 도청했고 치머만 전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암호문 해독에 나섰습니다. 대영제국은 1915년 러시아 제국에게서 받은 독일제국 코드북을 바탕으로 암호를 해독하고 충격적인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대영제국은 바로 이 사실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 분노한 미국과 들끓는 참전여론
우드로 윌슨 미합중국 대통령은 대영제국 정보부가 대통령 앞에서 직접 암호를 해독해 보여주면서 치머만 전보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영국계 인사들이 미국을 지배했고 대영제국 편이었던 인사들은 치머만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미국의 전쟁 참여를 외쳤습니다. 허나 아일랜드계 미국인과 독일계 미국인들은 전쟁 반대의사를 표했고 미국은 전쟁 참전을 두고 여론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허나 1917년 독일제국 해군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실시하면서 미국 상선들이 격침되었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상선을 무장할 것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제국 잠수함은 계속해서 미국 상선을 격침시키며 미국의 반독감정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측근은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고 싶어했습니다.
허나 독일제국은 치머만 전보를 보낸 적 없다고 우겼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중립을 지키겠다며 나서자 대영제국은 진실을 알면서도 항의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 반독 감정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1917년 3월 아르투르 치머만 독일제국 외무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본인이 한 일임을 인정하며 확인사살을 해버리자 미국 내 반독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미국 내에서 참전여론이 지배했습니다. 결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4월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한 후 미국 소규모 사단을 먼저 서부전선으로 급파했습니다.
- JP 모건을 위한 전쟁
사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JP 모건 체이스 은행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JP 모건 체이스 회사는 미국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거대한 은행으로 JP 모건 체이스 은행은 유럽에서 대전쟁이 발발하자 유럽 국가들에게 차관을 제공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1914년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가고 유럽 강대국들은 소모전을 하며 국력을 전쟁에 쏟아붇는 총력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강대국들은 국고를 전쟁에 소모했고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전쟁물자를 살 돈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전쟁물자를 중립국으로부터 수입하기 위해 차관을 대량 도입해야 했습니다. 특히 대영제국은 독일제국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차관과 전쟁물자를 수입했습니다.
미국은 19세기부터 먼로 독트린으로 아메리카에만 집중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강대국들은 대서양을 경계로 서로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먼로 독트린을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때문에 유럽 국가들에게 전쟁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미국 스스로 먼로 독트린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역시 미국의 중립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차관 제공을 금지했습니다. 때문에 미국 연방정부는 유럽 강대국들에게 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국무장관이 교체되고 새 국무장관이 된 로버트 랜싱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습니다. 로베트 랜싱 국무장관은 유럽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국력을 소모할 때 미국 차관 비율을 높여 추후 유럽 국가들에게 미국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득했고 대통령은 차관 제공을 승인했습니다. 허나 연방정부는 직접 차관을 주기를 꺼려했습니다. 그 때 JP 모건 체이스 은행의 CEO JP 모건 2세가 자진해서 유럽 국가들에게 차관을 제공했습니다. 대영제국은 바로 JP 모건 체이스 은행에서 막대한 차관을 제공받았고 미국의 전쟁물자를 수입하겠다는 계약을 맺어 미국 군수물자를 수입했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역시 마찬가지로 JP 모건 체이스에서 차관과 전쟁물자를 수입했습니다. JP 모건 체이스 은행은 연합국의 차관과 전쟁물자 수입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1917년 서부전선에서 연합국이 독일제국에게 질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1917년 말 수많은 연합군이 소모되고 독일제국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대영제국이 멸망할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그러자 JP 모건 체이스는 만일 대영제국이 멸망한다면 막대한 양의 차관을 되돌려받지 못해 은행이 파산할 수 있겠다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JP 모건 체이스는 대영제국과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의 참전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치머만 전보 사건이 터지고 미국 여론이 참전여론으로 변하자 JP 모건 체이스는 미국 정부에게 막대한 지원을 하며 미국의 참전을 중용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JP 모건 체이스 은행이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물론 미국 국민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여론에 따라 전쟁 참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광기에 휩싸인 미국
1917년 4월 동맹국에 선전포고한 미국은 빠르게 국가 보안법과 간첩법을 만들어 미국 전쟁의사에 반하는 행위나 동맹국을 우호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에 대영제국에 적대적이었던 아일랜드계 미국인과 독일계 미국인은 반발했지만 이미 미국 전역은 전쟁 참전 광기에 휩싸였고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면 바로 매국노로 몰아갔습니다.
민중은 웅변대회를 열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고 동맹국을 거침없이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동맹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언행을 못하게 사회적으로 압박했습니다. 더불어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영화와 전쟁 모집 포스터를 만들어 참전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미국 민주주의에 반한 행위였지만 광기에 물든 미국 민중은 자진해서 민주주의를 훼손했습니다.
전쟁에 미친 미국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친위조직 APL을 만들어 동맹국 출신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기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심지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무차별 습격했습니다. APL은 일터와 집 주변 등 모든 곳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협박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무조건 신고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며 독일계 미국인 명부를 만들고 일부를 투옥시키며 독일계 미국인들을 대놓고 버렸습니다. 미국의 박해에 고통받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결국 이름을 바꾸며 독일계 정체성을 스스로 없앴고 미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 미국의 참전
그 사이 미국은 동원령을 내려 병력들을 모집해 280만명의 병사들을 모집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병사들을 모아 존 퍼싱 장군 휘하의 미국 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을 창립해 프랑스로 보냈습니다. 프랑스 땅에 도착한 미군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마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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