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람&기독교 세계에 등장한 최강대국
13세기 말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등장한 오스만 베이국은 1389년 코소보 전투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해 발칸반도를 차지하고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스스로 로마로 칭했습니다. 기존 기독교 수호국이 멸망하고 이교도 신흥제국이 등장하자 유럽에 충격을 먹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517년 맘루크 술탄국을 멸망시키며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헤자즈 지역을 장악하고 맘루크 술탄국 수도 카이로에 살던 칼리프(이슬람 종교 최고 권위자)를 콘스탄티니예에서 살게 하며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부상했습니다. 쉴레이만 대제가 제국을 통치하는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영토확장 전쟁으로 방대한 영토를 얻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방대한 영토에서 얻는 막대한 양의 세금과 인구, 수도 콘스탄티니예를 중심으로 동방무역과 지중해 무역을 연결하며 얻는 막대한 이익으로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최강국으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멈추자 주변국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 주변국의 반격의 시작과 흔들리는 제국
오스만 제국은 동서양 무역을 중계하며 중간이익으로 국가의 부를 늘려갔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높은 관세로 손해를 보던 유럽 국가들은 지중해를 통해 동방 무역 거점으로 직접 가기를 원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정부의 막대한 지원 정책으로 시작된 신 무역로 개척은 대항해시대로 이어져갔습니다. 대서양 항로에 뛰어든 국가들은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는 오스만 수익의 감소로 이어졌습니다. 수익의 감소는 국력의 하강으로 이어졌습니다.
-유럽 그리스세력의 반격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멈추자 인근 지역의 반격이 시작 되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 신성 동맹의 반격인 대튀르크 전쟁을 시작으로 러시아 제국이 동방 정교회의 수호와 발칸반도 슬라브 족 해방을 명분으로 발칸반도와 캅카스 지역으로 공세에 나서며 기독교 세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해나갔습니다.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오스만 제국 술탄의 실권도 위축되었습니다. 약해진 술탄의 권위는 술탄을 모시는 정예부대 예니체리가 술탄을 살해하고 술탄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술탄의 권위는 지방총독들의 사실상 독립을 부추겼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지방에 총독을 임명하고 술탄이 총독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총독은 유능한 술탄의 신실한 종이 되며 하사받은 지역을 지배하고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무능을 알린 술탄의 모습을 본 총독들은 술탄의 명령을 무시하며 각자 군사력을 키워 지역의 군벌로 성장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의 반격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 세계 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그 지위를 위협받았습니다. 18세기 이슬람 극단주의 종파 와하브파가 디리야 토호국을 세우고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헤자즈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이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슬람의 중심지인 헤자즈 지역을 뺏긴 것은 더이상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을 수호하는 국가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술탄은 당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던 이집트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헤자즈 정복을 명령했고 그는 헤자즈를 정복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헤자즈를 바치며 종결되었습니다.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일찍히 나폴레옹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를 근대화했고 술탄의 명을 받아 헤자즈를 탈환하는 큰 공을 세우고 이집트에 잔존한 맘루크 세력을 소탕하며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집트가 충분히 강성해졌다고 생각하자 파샤는 술탄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이집트와 오스만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결과 오스만군은 이집트군에게 처참히 패배했고 이집트는 자치령으로 남았지만 사실상 독립을 얻었습니다.
- 발칸독립
2021.12.21 - [제1차 세계대전 시작] - [전쟁 전 상황: 발칸반도 편-1]오스만 제국의 후퇴와 발칸의 새질서
2021.12.22 - [제1차 세계대전 시작] - [전쟁 전 상황: 발칸반도 편-2]유럽의 화약고; 발칸전쟁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의 위협에 시달리는 동시에 러시아 제국을 위시한 발칸독립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며 빠르게 발칸반도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발칸반도에서 영향력 상실은 오스만 제국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발칸반도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와 가까운 곳으로 발칸에 적대국이 생기면 수도가 위험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스만은 발칸반도에서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상대적으로 먼 북아프리카 튀니지 영토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프랑스 식민제국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튀니지를 합병했습니다.
- 내부의 개혁. 하지만 실패한 개혁
오스만 제국은 전보다 강력해진 유럽 열강들과의 대결에서 연전연패하며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열강들의 공격이 한창인 1939년 술탄 압뒬메지트 1세 주도 하에 탄지마트 개혁을 하며 오스만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 술탄 압뒬메지드 2세는 개혁으로 약화된 술탄 권한에 불만을 품고 1877년 탄지마드 개혁을 무효화하고 술탄 전제 군주정으로 복귀하며 개혁은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 제국의 마지막 발악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에서 패배했습니다. 전 후 맺어진 산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니예 서쪽으로 발칸 일부만을 보존했고 동쪽으로 코카서스 산맥 아래 아르메니아 거주 지역에서의 아르메니아인 권리향상을 요구받았습니다. 또한 1882년 이집트는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되어버리며 오스만 제국은 제국의 해체를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불어난 국가 부채로 제국은 제정 파탄을 겪었고 그 틈을 타 유럽 자본 침탈과 내정개입에 시달렸습니다.
압뒬메지드 2세는 붕괴되어가는 제국을 살리기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외치며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연결하는 헤자즈 철도를 건설하고 교육과 군대 근대화에 투자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빠르게 불어난 국가 부채로 제국은 제정파탄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 틈을 타 유럽의 자본 침탈과 내정간섭이 이루어졌습니다. 오스만을 특히 위협한 국가는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으로 오스만 제국은 두 열강의 침탈을 막기 위해 독일제국에 손을 벌렸습니다.
압뒬메지드 2세는 붕괴되어가는 제국을 살리기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천명했습니다. 또 여러 민족으로 나뉜 제국을 중앙집권화하고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철도 건설에 열을 올렸습니다. 먼저 세계 각지 무슬림의 후원을 받아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연결하는 헤자즈 철도를 건설하고 다른 철도를 건설하려 했지만 국가 역량 부족으로 유럽 회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중 중요한 철도는 알레포에서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바그다드 철도로 독일제국의 도이체방크의 지원하에 건설이 추진되었습니다.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제국은 대양으로 진출해 식민지를 확장하는 팽창정책을 추진했지만 대영제국 해군의 방해로 대양으로 진출이 막혀있었습니다. 때문에 바그다드를 통한 페르시아만으로 진출은 독일제국 입장에서 좋은 돌파구였습니다. 또한 페르시아만과 이란은 당시 세계적인 산유지였기에 독일제국은 해당 철도로 안정적인 석유 공급처와 운송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철도는 독일제국의 국운이 달린 중요한 철도였습니다.
독일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불가리아 왕국&오스만 제국을 연결하는 철도 부설은 해당 국가들이 동맹관계였기에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단 한 국가 세르비아 왕국만이 적대 관계로 철도 부설의 걸림돌이었습니다. 동맹국은 세르비아를 자극하면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할 수 있어 신중히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대영제국 역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에 반대하며 나섰습니다. 대영제국은 독일제국이 페르시아만을 통과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은 1907년 페르시아만 입구인 쿠웨이트를 점령해 독일제국의 진격을 멈추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독일제국은 이에 반발했고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의 관계는 험악해졌습니다.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은 독일제국 세력의 확장정책이었고 이에 러시아 세력&영국 세력이 반발해 두 세력 간의 갈등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철도건설은 삼국동맹과 삼국협상 간의 갈등에 불을 붙이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 민족주의 발흥과 제국이 저지른 죄
압뒬메지드 2세는 쓰러져가는 제국을 살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쿠데타로 실각했습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청년 튀르크당은 압뒬메지드 2세가 폐지한 마드하트 헌법을 부활해 입헌군주제를 건립하고 제국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 군비 증강을 통과시켰습니다. 청년 튀르크당은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를 빠르게 추진해갔지만 청년 튀르크당도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범튀르크주의를 외치며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인의 국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튀르크 민족주의는 제국 내 타민족과의 심한 갈등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제국 내 민족갈등은 청년 튀르크당 등장 전부터 심각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초창기 때부터 튀르크인들을 1등 신민, 그리스-아르메니아인들을 2등 신민, 아랍인들을 3등 신민으로 등급을 메기고 차별대우를 했습니다. 2등 신민인 그리스-아르메니아인들의 불만도 컸지만 이슬람 수호국을 자처하는 오스만 제국이 같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을 3등 신민으로 하대하고 차별해 오스만에 대한 아랍인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이 유럽 열강들에게 얻어맞고 패퇴하기를 반복하자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해 눌러버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랍/아르메니아 독립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탄압과 학살로 쇠퇴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에서 패배하고 산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서방 기독교 세력의 맹공에 시달리던 오스만 제국은 동방에도 기독교 세력이 등장해 양면에서 기독교 세력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범이슬람주의를 외치며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대대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골라 학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아시리아인들도 학살당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제국의 피지배민족들이 제국의 더 강경한 탄압에 시달렸습니다.
이미 최악인 상황 속에서 청년 튀르크당이 튀르크 국가 건립을 주장하자 피지배민족들은 봉기를 시작했습니다. 발칸반도에서는 민족들이 봉기를 일으켜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했고 오스만 제국은 발칸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아랍 지역은 많은 아랍 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여러 부족으로 갈라진 아랍민족의 통일된 봉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뒤늦은 근대화를 추진하며 무리하게 튀르크 민족주의를 외쳤고 이는 제국의 구성원인 타민족의 반튀르크&반오스만 정서를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제국 내부의 갈등은 제국을 기어코 해체시켰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쇠락의 길을 착실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위협과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독일제국에 의존하며 남은 제국 영토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방대한 영토와 넓은 다민족 구역은 제국을 위태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음편은 유럽의 전통 군사 강국 오스만 제국을 지독히도 괴롭히며 유럽의 신흥 군사 강대국으로 평가받았던 러시아 제국 이야기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시작 > 강대국의 상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대국의 상황: 독일제국 편-1] 제국의 등장 (0) | 2021.12.30 |
---|---|
[강대국의 상황: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 편] 세계를 양분한 제국 (0) | 2021.12.29 |
[강대국의 상황: 이탈리아 왕국 편] 리소르지멘토 (0) | 2021.12.28 |
[강대국의 상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 다민족 동군연합국 (0) | 2021.12.27 |
[강대국의 상황: 러시아 제국 편] 제 3의 로마 (0) | 2021.1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