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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종료/그들의 목표

[그들의 목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편] 합스부르크의 영광

by 롱카이. 2022. 11. 9.
  • 유럽의 심장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15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Kaiser로 임명된 변방의 작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후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전성기인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식민제국을 이끄며 유럽 전체와 남아메리카의 영토를 가진 세계 최고의 가문임을 자랑했습니다.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이 분리되고 몇세기 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만 남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유럽을 움직이는 지배자였습니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고 그들을 존중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경쟁자인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존경심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 하느님 프란츠 카이저 폐하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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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의 상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 다민족 동군연합국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은 혼란기 끝에 프랑크인들의 왕국으로 안정화되었습니다. 서기 800년 독일을 지배하던 프랑크인 왕 카롤루스 1세는 교황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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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 아래 규합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카이저 아래 규합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서로마 제국의 황제Caesar를 계승한 카이저Kaiser로 여러 민족을 통합할 권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이저Kaiser는 중유럽의 수많은 민족을 지배하지만 그들을 억압하지 않고 자치권을 보장하며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고 여러 민족들은 카이저Kaiser를 존경하며 그의 아래에 모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러 민족을 규합한 다민족 제국으로 그 위상을 널리 알렸습니다. 1848 민족주의 혁명이 발발할 때 오스트리아 제국은 위기를 맞이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근면성실한 집무와 자치권 보장으로 신민들의 마음을 샀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민들은 불완전한 민족 국가보다 안전한 오스트리아 제국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머저르 민족만 꾸준히 독립을 요구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출범하며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1907년 발칸지역
1907년 발칸 지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문제를 해결한 후 발칸반도로 카이저Kaiser의 날개를 펼치려고 했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적극적인 아프리카 식민지 팽창정책을 보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반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권에 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가톨릭을 보호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용을 다시 알리려고 했습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팽창 이념
세르비아 왕국이 원했던 세르비아 제국 시절
세르비아 왕국이 원했던 세르비아 제국 시절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당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과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독립국을 확보하는 것을 팽창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무슬림 인구가 많지만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알바니아 공국을 적극 지원하며 알바니아 공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중단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외의 다른 발칸 독립 세력도 지원했습니다. 허나 세르비아 왕국은 남슬라브인을 합친 대세르비아 건국을 노골적으로 표현했고 러시아 제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은 갈등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 사라예보 사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장성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장성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세르비아 왕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칸 국가들이 자주 독립을 유지하되 합스부르크 가문을 섬기는 국가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여론은 둘로 나눴습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과 전쟁에 찬성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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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서막] 보스니아에서 시작된 총성

세력 균형: 삼국동맹 1850년 이후 유럽 전역에서 충돌의 기미가 보였습니다. 동유럽 방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충돌 조짐이 보였고 서유럽에서 대영제국과 독일제국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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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카이저Kaiser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쟁을 반대했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은 전쟁을 찬성했습니다.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사라예보 사건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이 치욕을 되갚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유럽의 반응은 세르비아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 내부에서도 사라예보 사건이 옳은 지 논란이 일어났고 유럽 강대국들은 세르비아 왕국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세르비아 왕국의 우방이었던 러시아 제국 역시 초반에 사라예보 사건의 정당성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 주류였습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남슬라브인들은 남슬라브인이 저지른 실수를 남슬라브인이 직접 혼내주자며 전쟁 전에 너도나도 자원입대해 세르비아 왕국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르비아 침공을 준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세르비아 침공을 준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세계가 사라예보 사건을 비난하자 장성들 사이에서도 처음에 갈린 의견이 전쟁을 하자는 의견으로 합쳐지기 시작했고 약 한달 간의 논의 끝에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카이저Kaiser도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고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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